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책이 어떤 자리에서 쓰였는지부터 밝혀 두려 한다. 저자들의 입장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문 전체를 어떤 시선으로 읽으면 되는지, 그 좌표를 독자와 미리 공유해 두려는 것이다.
저자 셋은 한국에서 디지털 자산, 토큰화, 스테이블코인, Web3, 핀테크 규제, 크로스보더 자산 거래 자문을 다년간 다뤄 온 변호사이자 정책 자문가다. 가상자산사업자(VASP)의 전 주기 자문, 실물 자산의 토큰화 구조 설계, 글로벌 결제 사업자의 한국 진출과 한국 사업자의 해외 진출, 그리고 한국웹3블록체인협회를 통한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논의 등 디지털자산 분야의 입법·정책 의견 형성이 평소 업무의 골격이다.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한국 가상자산 거래소의 진입에서부터 파산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에 걸쳐 자문해 왔다. 다른 한 사람은 미국 법조 자격으로 글로벌 결제 표준과 국경 간 거래 자문을 다룬다. 또 한 사람은 한국 결제·핀테크 시장의 사업 구조와 자문 실무를 이끈다.
그러나 솔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에이전틱 커머스’는 한국에서 누구도 의미 있는 자문 트랙 레코드를 쌓지 못한 새 분야다. 저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분야의 자문 시장은 본격적으로 열린 적이 없고, 이 책이 인쇄에 들어가는 시점에 한국의 어느 로펌이나 자문사도 이 영역만으로 의미 있는 사례집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에이전틱 커머스 전문가가 쓴 책’이라는 이름표는 이 책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책은 아직 세상 어디에서도 쓰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인가. 이 책은 ‘에이전틱 커머스 전문가의 책’이 아니라, 한국 디지털 자산·핀테크·플랫폼 규제 자문가 셋이 인접 영역의 시선에서 에이전틱 커머스를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이 19개 장에 걸쳐 다루는 어려운 문제들, 즉 결제 권한의 위임 구조, 신원 검증, 국경 간 자산 흐름, 자율 결제의 책임 분담, 데이터 이동권, 자사 우대 알고리즘 규제는 모두 저자들이 다년간 인접 영역에서 다뤄 온 문제들의 ‘응용형’이다. 가상자산 거래소의 파산 절차에서 마주친 이용자 자산의 보관·반환과 권한 처리의 쟁점은 에이전트 결제 위임장(mandate)의 문제와 구조가 닮아 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적용 법리의 좌표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해 둔다. 파산은 이미 위탁된 자산의 귀속과 배당이라는 도산법의 문제이고, 에이전트 결제는 대리권의 수여 범위와 그 효과의 본인 귀속, 표현대리, 무권한 결제 책임이라는 민법·전자금융거래법의 문제다. 같은 것은 조문이 아니라 문제의 구조다. 누군가의 자산을 다룰 권한이 시스템에 위탁되어 있고, 사고가 났을 때 그 권한의 경계를 기준으로 책임이 갈리며, 그 경계를 미리 그어 둔 문서의 품질이 분쟁의 승패를 가른다는 구조. 덧붙이자면 거래소 파산의 권한·책임 분담은 한국에서 사례가 드물고 법리도 아직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데, 정리된 법리가 없는 자리에서 답을 만들어 본 경험이야말로 같은 공백 위에 서 있는 에이전틱 커머스에서 쓰이게 될 경험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문에서 다룬 신뢰 인프라 규격은 에이전트 신원 검증이 부딪히는 문제와 과제의 성격이 같다. 물론 전자는 금융 규제의 영역이고 후자는 보안·개인정보 법제의 영역이라 적용 법령은 다르지만, 규제가 요구하는 신뢰를 검증 가능한 기술 규격으로 번역해 내야 한다는 과제 자체는 동일하다. 토큰화 자산의 크로스보더 자문은 글로벌 에이전트 표준의 한국 적용 문제와 같은 법리 위에 선다. 즉, 이 책의 자산은 에이전틱 커머스 직접 경험이 아니라, 그 어려운 문제들이 ‘이미 어디서 풀려 왔는지’에 대한 인접 영역의 누적 시선이다.
이런 사정을 미리 밝히는 것은 책의 신뢰를 깎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직접 트랙 레코드가 없는 영역에 대해 ‘다 안다’고 단언하는 책보다, ‘인접 영역에서 본 같은 구조의 문제를 들고 새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정직하게 자기 자리를 밝히는 책이 더 믿을 만하다. 클라이언트가 자문가에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이 분야를 해 봤습니까’가 아니라 ‘이 분야의 어려운 문제를 어디까지 정확히 보고 있습니까’이며, 그 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자신이 선 자리를 정확하게 밝히고 시작하는 글이다.
이 책이 선 자리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저자들이 잘 아는 영역의 시선으로, 저자들이 아직 자문해 보지 않은 영역을 가장 정확히 풀어내려는 시도다. 그 시도가 어디까지 성공했는지는 독자가 본문을 읽고 판단할 일이다.